(사무엘상 2:11-21) |
오늘도 주님 생각 (오스틴 바우교회 정용한 목사님 나눔)
1
자리가 신앙을 만들고, 환경이 자동적으로 건강한 신앙을 주는것은 아닙니다.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살지 않았지만 저의 두 딸은 ‘목회자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확실한것은 이들이 ‘목회자의 자녀’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딸이 자주 교회 오고, 심지어 ‘섬기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이들의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목사’가 ‘건강한 신앙’을 보장하는것이 아니라는것도 알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모든 환경과 상황과 배경이 ‘건강한 신앙’을 위한 최고의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완악한 자들보다 더욱 악한 사람들이었고, 신앙을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자주 나오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섬기는 ‘사역의 감투’로 신앙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진심이 없는 허울의 신앙은 거짓되고 역겹기 마련입니다. ‘허울의 신앙’은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무시합니다.
‘신앙의 지위’로 신앙생활 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의 감투’를 나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환경과 상황을 핑계로 자녀의 신앙을 돌보지 않는 실수를 멈추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힘쓰겠습니다. 그분을 경외하겠습니다.
2
제 입장이 그래서 그렇겠지만 엘리 제사장이 자꾸 눈에 걸립니다. 그에게 나를 투영하게 됩니다. 어린 전도사 시절이 생각납니다. 청년 성도님이 교회에 찾아옵니다. 따듯하게 환대합니다. “잘지내졌어요?! 요즘 별일 없으시구요?” 일상의 대화가 따듯하게 이어집니다. 대화 가운데 성도님이 말씀하십니다. “요즘 부모님 사업 때문에 문제들이 있네요 전도사님 좀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대화가 끝날때쯤 온 마음을 다한 기도로 만남을 마무리합니다. 그 청년에게 저는 세상 따듯한 전도사이고, 가족에게 축복이 되는 그런 전도사입니다. 그런데 그때 막상 우리 집은 ‘빨간딱지’가 붙고 아버지, 어머니는 심신이 지쳐갈 때였습니다. 밖에서는 세상 따듯하게 기도해주던 ‘전도사’였지만 집만 오면 입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못난 아들이었습니다. 망해가는 집을 보고 싶지 않았고, 심신이 지쳐 쇠약해져가는 부모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참 어리석고, 못났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세인’의 모습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엘리가 그렇습니다. 엘가나와 한나에게는 세상 따듯한 목사입니다.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축복하며 “당신에게 더욱 자녀의 축복이 있을꺼예요!” 기도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아들들은 나몰라라 입니다. 자녀들의 행태를 온 마을이 압니다. 그러니 엘리 제사장이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쏟아야할 관심과 의무를 다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이중생활 입니다. 밖에서는 좋아보이는데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경험했고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저도 자칫 잘못하면 빠질수 있는 위험입니다. 엘리 제사장을 보며 정신 차려야겠습니다. 건강한 신앙으로 가족과 공동체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자가 되야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중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엘리의 발자국’을 따르지 않게 되기를 도전합니다.
오늘의 기도
엘리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족을 더욱 사랑하고 신앙의 열심을 내는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환경과 상황, 지위와 신앙의 감투로 내 신앙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건강한 신앙을 살아내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하루 되게해주세요! 아멘